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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선산 6개 지역에 소재한 118개의 비석과 비문을 연구한 조사보고서이다. 경북 구미는 원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수많은 인물의 행적이 금석문(金石文: 쇠붙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글)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는 의로운 소를 묻은 의우총이 있다. 의우총 뒤에는 의로운 소의 이야기가 돌에 조각된 의우도가 있다. 예전에 농부 김기년이 소를 몰며 밭을 갈다가 호랑이에게 공격을 받자 소가 호랑이를 뿔로 받아 김기년을 구했다. 그러나 김기년은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사흘 뒤 소도 죽었다. 소는 김기년 무덤 근처에 묻혔고 당시의 선산부사가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주고 화공에게 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의우총과 의우도는 훼손되었는데, 1993년 새 단장하면서 다시 조성하였다.
장석규(張錫奎)은 그의 아버지 시호(時皡)가 고을 사또 이갑회의 무고로 죄인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옥중에서 테어났다. 그 후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전라도 강진의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9살 때 섬 사람들의 괴롭힘으로 어머니와 누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홀로 남은 장석규는 부지런히 노력하여 자립 한 후,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주변의 도움으로 신원되었다.
임진왜란때 왜군들은 천생산선을 함락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이 산성이 천연의 요새지인데다가 곽재우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법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천생산의 서쪽에는 미덕암(米德岩)이라는 불쑥 튀어나온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바위에는 곽재우 장군의 무용담이 깃들어 있다.
열녀 약가는 고려시대 충신이었던 길재 선생과 한 마을에서 자랐다. 조을생(趙乙生)에게 시집을 가서 화목하게 살았다. 하지만 왜구들이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마을을 불사르고 약탈을 일삼았다. 조을생은 의병이 되어 싸우다 왜놈들에게 잡혀서 끌려갔다. 조을생이 죽었다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은 약가에게 재혼을 독촉하였지만 듣지않고 8년을 문고리를 잠그고 외롭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그리던 남편이 살아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약가를 열녀로 표창하고, 「삼강행실도」에 기록하였다.
우용택(禹龍澤)은 개항기 경상북도 의성 출신의 애국지사로 생김이 우람하고 풍채가 좋았으면 의기가 당당하여 거리낌이 없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는 친일 매국노들을 직접 찾아가 매국 행위를 강개지사(慷慨之士)로 널리 알려져있다.
옛날에 임금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 국태민안할 수 있는 왕돌의 터를 찾아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미행하다가 선산에 이르렀다. 선산의 산천은 풍수지리적으로 적한한 곳이었다. 하지만 선산이 서울이 되지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은 진양인(晋陽人)으로 태종 2년(1412)에 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출생하였다. 세종(1438년)때 식년문관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세조때 소명으로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하위지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 있는 ‘의우총’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찍 과부가 된 박씨는 암소 한 마리를 기르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키우던 암소가 새끼를 낳은지 사흘만에 죽어버렸다. 밀양 박씨는 송아지를 어린 자식 키우듯이 정성스러 길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송아지는 밭일을 할 수 있는 제법 큰 소가 되었다. 하지만 살림이 쪼들리던 박씨는 할 수 없이 어느 농부에게 소를 팔았다. 그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박 씨는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상여를 출발하려 할 때 전에 박씨가 팔았던 누런 암소 한 마리가 달려와서는 상여 앞에서 눈물을 흘리더니 미친 듯이 부르짖고 날뛰다 죽었다고 한다.
열녀 박향랑은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향랑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성질이 못된 계모는 향랑을 학대했지만 조금도 성내지 않고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순종했다. 그녀는 17세에 칠봉에게 시집을 갔지만 성질이 악한 칠봉은 향랑을 학대하였다. 결국 향랑은 친정으로 도망쳐 왔지만 계모 또한 그녀를 박대하였다. 오갈곳 없는 향랑은 투신자결을 하기로 마음 먹고 「산유화」를 부른 뒤 강물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 당나라로 건너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지엄은 의상을 특별한 예로 맞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대사가 지엄 스님 밑에서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돌아와 금오산 봉우리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치고 수도 할 때 선녀가 하루 한 끼의 밥을 내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약사암’이라 이름 지었다. 약사암은 모든 중생을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약사여래에서 연유한 것으로 역사적 의의가 깊은 암자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소백산맥 큰 줄기가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의 경계에서 매듭을 짓는 산은 금오산이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보산(大本山)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복숭산(北崇山)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의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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