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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을 개괄하고, 순창군 각 읍·면별로 상세한 전쟁사를 담아낸 책이다. 전북 순창의 근·현대사는 아픔의 연속이었다. 심각했던 일제의 수탈과 6·25동란을 중심으로 개항기부터 현대까지 순창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을 다룬다.
고흥읍교회는 1901년 4월 25일 선교사 오원 목사가 당시 한약방을 경영하는 신우구씨를 비롯한 목치숙, 박무응, 박용섭, 설준승, 이층흥씨 등이 전도를 받고, 소아 정수근, 김태수 등 몇몇의 소아들과 함께 신우구씨 한약방에서 예배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6년 9월 고흥읍교회(당시는 옥하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22년 8월 옥하리에 조선기와 12칸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1954년 4월 15일에 현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래서인지 1978∼88년에는 장년 450여명이 출석, 총 700여명의 교도 수를 자랑했다. 이 석조건물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내부는 개조를 진행했다.
조병수 가옥은 인천광역시 중구 남복동에 있는 경기·충청도 지방에 많은 중부형의 전형적인 주택이다. 사랑채가 담 바깥에 있어 외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1919년 용유도 3·28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한 장소가 바로 조병수 가옥이다.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였던 김종숙은 을사늑약 이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내려가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을 세웠다. 명동서숙은 1907년 문을 열었고, 척곡교회 예배당은 1909년 건립되었다. 산골 교회인 척곡교회는 개신교 전파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봉화의병장과 독립투사들이 비밀 회합을 가지는 장소였고, 간도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였다. 명동서숙은 북간도의 명동학교와 명칭이 같다. 척곡교회를 세울 당시 김종숙은 평신도였다. 척곡교회는 처음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 놓여 있었다. 김종숙은 1920년대에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해방 직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 김종숙의 처남인 봉화의병장 석태산은 소백산에서 잡혀 현장에서 처형됐다. 명동서숙은 정식 학교가 되지 못한 채 운영되다가 1943년 폐교되었다. 미음 자 형태로 지어진 척곡교회와 초가집 명동서숙은 산골 오지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에야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척곡교회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들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남석 윤우식 선생의 생가는 16세기에 지어진 고택이다. 1922년 화재로 예전 집은 불탔고, 같은 자리에 규모를 줄여 지은 집이 현재 남아있는 기와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튼 입구 자로 배치되어 있고, 옆에는 사당(죽호당)이 있다. 윤우식은 1920년대 후반부터 농민운동을 벌였고, 1934년 ‘예천 무명당’이 결성될 때 참여하여 지보면의 조직을 책임졌다. ‘예천 무명당’은 농민을 넘어 각계각층의 조직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벌이려 했던 조직이다. 예천 무명당은 1934년 초 일경에 발각되어 무더기로 체포되었고, 윤우식은 지도부 11인으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다.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윤우식 생가는 등록문화재 제571호다.
서울 독립문은 독립협회가 자주독립국가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석조문이다. 19세기 말 열강에 의한 이권침탈과 주권침해 압력이 거세지자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다. 이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뜻을 모아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 근처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했던 모화관을 고쳐 독립관이라고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영은문과 모화관은 자주독립의 상징들로 변모해 나갔다.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가 있다. 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면서 1992년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주민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하여 1999년 생가가 완성되었다. 2015년에는 생가 관리 건물로 쓰이던 곳을 리모델링해 단재홍보관인 단채헌이 개관되어 신채호와 대전의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는 근대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영해장터거리가 있다. 다양한 상가주택과 금융조합, 공소, 신문사 지국 등의 건물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근처에 영해만세시장이라는 전통시장이 있어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영해장터거리에서 1919년 3월 18일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벌어져, 이를 기념하기 위한 탑이 건립되고 문화제가 개최되기도 한다.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은 대구광역시에 남아 있는 근대 실업교육의 상징이다. 1923년에 대구공립상업학교로 개교한 후 대구공립상업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현재는 일반계 고등학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가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구 대구상업학교는 항일운동과 관련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42년 재학생들이 태극단을 만들어 일제에 항거한 일이 대표적이다. 비록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학생들의 힘으로 이끈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는 충청북도 최초의 성당인 감곡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신부 임 가밀로에 의해 감곡성당이 설립되었다. 감곡성당 터는 명성황후의 6촌오빠인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터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응식도 서울로 압송되면서 집터는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렸고 이를 임 가밀로 신부가 헐값에 사들여 감곡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성당 옆에는 사제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매괴박물관으로 재단장하여 가톨릭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개성고등학교 역사관은 학교의 업적과 전통을 기리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1991년에 세워진 역사관이다. 개성고등학교는 1896년에 부산 지역의 근대교육을 위해 세워진 개성학교가 전신이다. 개성고등학교는 부산 최초로 근대교육을 이끌어 간 학교이자,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무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폭탄을 투거한 독립운동가 박재혁이 대표적인 개성고등학교 출신 인물이다. 개성고등학교 역사관은 학교 역사뿐만 아니라 부산지역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나철은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다. 과거에 급제를 한 후 그는 관직에 나가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귀향해 10년간 수행을 한다. 1904년 포츠머스조약, 러일전쟁, 을사조약 등이 일어나자 애국계몽운동, 민간외교운동, 을사오적 암살 시도 등을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는 애국계몽운동이나 매국노 암살로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다시 되살리는 것, 즉 단군신앙으로 단결해서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종교운동만이 국권을 회복할 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종교를 중광한 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포교활동과 국학운동, 독립군 양성 등을 한다. 일제가 대종교를 탄압하자 순교로서 항거한다.
황원태(黃源泰)는 강화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출생하여 1950년에 별세하였다. 1935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중앙고보반제동맹(中央高普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반제동맹은 1933년경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조국의 독립과 신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1935년 2월 18일, 4학년 학생들의 퇴학처분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반제동맹’ 관련자로 공판에 회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5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형을 선고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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